도원리(桃源里) 영월군 수주면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안도내(內桃川), 서운리(西雲里) 우변면의 바깥도내(外桃川) 일부를 합한 후 도원리라 하였다. 마을의 중심은 섬안이(島內)안쪽에 있는 안도내(內島內)로 땅이 기름지고 논이 많은 들녘으로 수주 지서가 있다.
이곳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2개 행정리에 65가구 195명의 주민들이 안도내, 가매월, 엄둔, 양지말, 상터, 섬안이 등의 자연 부락을 중심으로 벼, 콩, 옥수수, 감자, 고추, 담배 농사와 토종벌, 흑염소, 표고버섯재배 등으로 농가수입을 올리고 있다.
삼공제명암(三公題名岩) 도원리 입구로 무릉리에 있는 요선정을 마주 보고 있다. 수주의 무릉도원을 중심으로 충신인 원호(元昊, 觀蘭), 조여(趙旅, 魚溪), 이수정(李秀亭, 桃村)이 1456년(景泰八年, 三月旣望) 세조 2년에 단종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며 그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놓았으나 1987년 무릉∼운학간의 도로 확충으로 파괴되었다. 그후 영월충절현창회(寧越忠節顯彰會)에서는 삼공(三公)후손들의 후원으로 1990년 6월에 지금의 위치에 복원하였다.
구레골 햇골 위쪽에 있으며, 이 골짜기에는 삿갓모양으로 생긴 큰 바위가 있는데 옛날 호환(虎患)이 심하던 시절에 호랑이가 마을의 처녀를 물고 이 곳 삿갓바위밑에서 잡아먹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구레미골이라고 불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구레골이 되었다. 구레미란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이 호랑이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꽃바우 약수터 요선정 입구에서 안도내(內島內)로 들어가는 도로 우측에 있다. 기암절벽의 병창에서 나오는 물을 호수로 연결하여 이용하는데 여름철에는 제천, 원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영월군 수질검사 314호로 지정 받은 곳으로 약수터 표지석은 1993년도 전국 지파출서 친절봉사 1위로 전 직원이 특진한 수주지서장(이진우)과 수주면장(이태희)이 주위의 조경을 하였다.
꽃바우 각시바위와 삿갓바위 사이에 있다. 이른 봄부터 이 곳 바위틈에서는 이름모를 꽃들이 많이 피어나므로 꽃바우라고 한다는 얘기와 각시바위와 신랑바위 사이에 있으므로 꽃바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큰 바위가 꼴뚜서 있으므로 꼴뚜바위가 꽃바우로 변한 것 같다.
신랑바우 도원리 동쪽인 중방보 입구에 있는 바위로 신랑이 사모관대를 하고 서 있는 형상의 바위이다. 꽃바우 건너편에 있다.
각시바우 꽃바우 서쪽에 우뚝 속은 바위로 그 형상이 족두리를 쓴 새색시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건너편인 설구산(雪龜山)밑에는 신랑바위가 있어서 주천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도원산성(桃源山城) 핵솔(화약골)과 꽃바우 뒤에 있는 산성(山城)이다. 법흥산성, 공기산성과 같이 평창방면에서 넘어오는 적을 막기 위해 쌓은 토성과 석성이 혼합된 형식으로 지금은 2km정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근처에는 횟골(화약골), 병지내(兵陣川)등 군인들의 주둔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891년 원주의 토호세력인 양길(梁吉)의 부하가 된 궁예가 이 곳에서 진(陳)을 치고 柰城(영월), 郁烏(평창), 御珍(진부), 溟州(강릉)를 공격했었다고 한다.
성안이(城內) 안도내 마을의 동북쪽으로 도로에서 약 2km쯤 올라가면 산 중턱에 넓고 평평한 도원산성(桃源山城)이 있었으므로 성안이라고 불렀고 한때는 화전민들이 살던 곳이다.
말무덤 도원리의 저치재(低峙)밑에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옛날 용마가 장수를 찾으며 울부짖다가 이 곳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그러나 말이란 크다는 뜻이고, 말무덤은 큰무덤을 의미한다.
용마개울 도원리에서 주천강으로 흐르는 개울로 이 곳에서 용마가 태어났으므로 용마개울이라고 부른다.
용소(龍沼) 안도내 동쪽 용마무덤 밑에 있어서 용소라고 부른다. 이 곳은 물이 깊어서 옛날에는 명주실 한 꾸리를 다 풀어도 땅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물빛이 푸르다 못해 진한 쪽빛에 가까우며, 옛날에 큰 이무기(용)가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버들강변 용소와 바닥소 사이에 있는 넓은 강변이다. 봄이 되면 동네 아이들이 버드나무 가지로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던 곳이므로 버들강변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버들이란 곧고 길게 뻗은 곳을 의미하므로 버들강변은 곧고 길게 뻗은 강변을 뜻하는 이름이다.
바닥소 안도내 앞 강변에 있는 작은 소이다. 소(沼)의 바닥이 깊게 파엿으므로 바닥소라고 한다.
안도내(內島內) 도원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수주지서가 있는 곳이다.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는 곳으로 섬안이(島內)안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안섬안이 또는 안도내라고 부르고, 그 건너편인 주천강 밖에 있는 도천리(桃川里)는 바깥도내라고 한다.
이 곳에서 전승되어 오던 안도내들 방아타령은 1991년도 원주에서 있었던 제 9회 강원도 민속예술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우수상을 받았다. 수주면 도원리의 주민들을 중심으로 31명으로 구성된 출연팀들은 모내기, 김매기, 벼 베기, 타작 등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을 구성진 노랫가락과 해학적인 풍자로 펼쳐내어 관중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뾰족봉 점터와 소통골 사이에 있는 끝이 뾰족한 산봉우리로 구룡산 줄기이다 일명매봉산이라 부른다.
소통골 안도내 북쪽으로 소나무가 많은 갈비봉밑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 모양이 소여물통처럼 길고 움푹하게 파였으므로 소통골이라 한다.
점터(店垈) 안도내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석영, 장석 따위의 암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분해된 점토(粘土)가 많은 곳이다. 예전부터 이곳에는 물동이, 화로, 소래기, 중도리독 등을 만들던 옹기점이 있었으므로 점터라고 불렀다. 일명 점대(店垈)라고도 부른다.
장수바위 점터 북서쪽인 엄둔에서 흘러내리는 살구넘이재 개울가에 있는 바위이다. 그 모습이 웅장하여 마치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린 장수처럼 위풍이 당당하므로 장수바위라고 불렀다. 이 곳은 맑은물이 흐르고 숲이 우거졌으며,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장수바위소 피두리의 장수바위 앞으로 깊은 소(沼)를 이루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피두리(피도리) 안도내의 북쪽인 엄둔에 있는 골짜기로 피두리 서쪽에는 소재(쇄재)가 있다. 이 곳에는 20m 크기로 자라는 큰 피나무가 많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일명피도리라고 한다.
살구넘이재 피두리에서 수주면 마장동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이다. 산능성이에 개살구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살구꽃이 피어 온 산천을 붉게 물들인다. 즉 개살구나무가 많은 고개이므로 살구넘이재라 한다.
쇠재(牛峙) 피두리에서 운학리의 두무골을 지나 하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산 중턱에 소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으므로 쇠재라고 부르는데, 일명 우치라고도 한다.
소재마을 (牛峙洞) 피두리 건너편으로 쇠재 고개 밑에 있으므로 소재마을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가매월 도천국교 엄둔분교가 있는 곳이다. 이곳을 지나면 가마골로 넘어갈 수 있으므로 가매월이라 부른다 월(越)이란 넘어간다는 뜻이다.
엄둔(嚴屯) 안도내의 북서쪽 6km쯤 되는 곳에 있는 마을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뒤에는 높은 둔덕배기인 엄둔치고개가 있으므로 엄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마을의 북동쪽에 있는 상터를 지나고 엄둔치(嚴屯峙)를 넘으면 법흥리의 응어터로 가는 길이 있고 널목재를 넘으면 법흥사가 있는 절골로 간다. 엄둔이란 큰 언덕이란 뜻인 둠이 둔으로 변한 것이다.
가메골 엄둔의 양지말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은 인가가 없다. 동네의 지형이 가마솥처럼 우묵하게 생겼으므로 가마골이라 했으나 이지방에서는 가마를 가메라고 부르고 있으므로가메골이 되었다.
양지말 엄둔분교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했볕이 잘 비치는 따뜻한 곳이므로 양지마을→양지 말이라 한다.
거칠치(居峙) 엄둔위 양지 말에서 운학의 고일리(古日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곳은 옻나무가 많아서 거칠치라는 지명이 붙었다.
개골바위 엄둔마을입구에 있는 큰 바위로 개구리 모양을 하고 있다.
곰골 안도내에서 엄둔으로 가는 우측에 있는 큰 골짜기이다. 옛날 이곳에 곰이 겨울잠을 자던 굴이 있었으므로 곰굴, 곰골 또는 곰네미라고 불렀다는 얘기도 있으나, 실제로 곰은 크다는 뜻이므로 큰 골짜기를 의미한다.
엄둔치(嚴屯峙)도원리 넘내에서 도마니골을 지나 법흥리의 응어터로 가는 길과 널목재를 지나 법흥사가 있는 절골로 가는 길이 있다. 엄둔으로 넘나드는 높고 험한 둔덕으로 된 고개이므로 엄둔치라고 한다.
상터(上基) 안도내의 북쪽으로 도원리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엄둔의 막바지에 있는 끝마을로 법흥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므로 윗터 또는 상터라고 한다.
엄둔치(嚴屯峙) 도원리 넘내에서 도마니골을 지나 법흥리의 응어터로 가는 길과 널목재를 지나 법흥사가 있는 절골로 가는 길이 있다. 엄둔으로 넘나드는 높고 험한 둔덕으로 된 고개이므로 엄둔치라고 한다.
널목재(板項峙) 도원리(桃源里)의 엄둔 위에 있는 상터에서 법흥사가 있는 법흥리(法興里)의 절골로 가는 높은 고개로 수백년 묵은 소나무 숲이 가득하게 우거져 있다. 구봉대 밑의 이 고개를 넘자면 법흥사로 가는 절골 쪽에 큰 벼랑으로 된 낭떠러지가 있다. 널목재의 능성이는 수만평의 넓은 구릉으로 화전민들이 많이 거주했으며 법흥리 사람들이 이곳에서 콩, 팥, 옥수수 등 잡곡농사를 많이 지었다. 즉, 땅이 평평하고 넓은 고개목재이므로 이 고개를 널목재(板項峙)라고 하였다. 널은 넓은 곳을 뜻한다.
구봉이(九峰) 엄둔의 상터와 법흥리 절골의 연화봉 사이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사자산에서 뻗어 내린 산맥이 주산인 연화봉을 형성하여 적멸보궁의 명당혈을 형성했는데, 그 명당터를 보호하는 우백호의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바로 구봉대(九峰臺)라고 한다.
말굴이재(馬轉) 도원리에서 운학리로 질러 넘는 구비가 심하고 산세가 험악한 고개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말(馬)을 타고 이 고개를 넘다가 말이 강물로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므로 말굴이재 또는 말굴이라고 불렀다. 말굴이재 밑에는 말굴이라는 동네가 있다. 그러나 말굴이재란 말이 굴러 넘어질 정도로 높고 험한 고개를 지칭하는 상징적인 뜻이지 실제로 말이 굴러 떨어졌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긴소 말굴이와 섬안이(島內)사이의 강변에 있는 소(沼)인데 주변의 자연 경관이 아름답고 여름철에는 피서객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긴소란 깊은 소가 변한 말이다.
한치(汗峙) 말굴이에서 두산리(斗山里) 두덕골로 질러가는 고개이다. 길이 험하고 경사가 심하여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나 짐승들까지도 땀을 흘리는 고개이므로 한치라고 부른다는 얘기도 있지만 한은 크다는 뜻이므로 높고 큰 고개를 의미한다.
단지바우 초원농원을 지나 섬안이(鳥內) 동쪽 강가에 있는 큰 바위이다. 단지처럼 움푹하게 구멍이 뚫린 이 바위는 6.25사변때 피난하던 사람들이 이곳에다 김치를 담구어 먹었으므로 단지바우라고 부르게 되었다.
섬안이(島內) 횡성과 평창의 태기산에서 발원하여 둔내(屯內)와 안흥(安興)을 거친 주천강은 강림(講林)에서 치악천에서 내리는 물과 합쳐지고, 도원리의 섬안이 앞에서는 원주군(原州郡) 신림면(神林面) 황둔(黃屯)에서 흐르는 황둔천과 합류한다. 주천강은 황둔천과 함께 복주머니 형상의 섬안이(島內)를 곡류하여 흐르므로 이곳은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섬이 된다.
섬안이(島內)라는 지명도 이러한 지형에 의해서 생기게 되었다. 예전에는 여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남병우씨(南炳右氏) 한 가구만 살고 있다. 마을 앞 당숲에는 서낭당이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다함께 정월초사흘에 당고사를 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난 지금도 조상들이 모시던 당을 버려둘 수 없어서 남병우씨 혼자서 주각포의 메를 지어놓고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당에 당고사를 올린다고 한다.
멍석바우 섬안이(島內) 서쪽으로 흑둔지와 당숲사이의 강변에 있는 바위이다. 짚으로 만든 자리인 멍석처럼 생긴 큰 너럭바위가 있으므로 멍석바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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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 아무쪼록 도촌공 시향이 잘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02/17-11:00]- 이홍선: 도촌 이수형(挑村 李秀亨)이신되 위글에 함자가 삼공제명록에 이수정으로 되었읍니다 오자를 수정해주새요. -[02/18-12:10]- 이석: 예... 그런데 사마방목의 문헌을 봐도 왜 이수형(李秀亨)을 이수정이라 기록했는지 저도 그것이 의문스럽습니다. -[02/18-18:54]- ###: 元·趙·李 三公 題名
수주면 무릉리 요선정 건너편에 있는 岩刻名(암각명)으로 元昊(원호號:觀蘭), 趙 旅(조여 호:漁溪),李秀亨(이수형 호:挑村) 이 세사람은 무릉계곡을 거점으로 자주 만나 단종의 안위를 근심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 놓은 이 제명은 바로 그들의 행적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는 1987년 무릉-운학간 도로개설공사로 파괴되었는데 1990년 6월 영월충절현창회에서 원위치의 서남방 백보가량되는 지점에 복원하였다. -[06/22]-